호랑이 시리즈(12) 수양대군의 반골 기질을 미리 알아본 세종 ..

칼럼 > 2022-12-04 17:20:44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있는 법. <세조실록>에는 없지만 1442년 3월 15일 <세종실록>에는 수양이 낙마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슴을 쫓던 수양의 말을 다른 사슴이 와서 받았다. 이 때문에 천하의 수양대군이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수양이 탔던 말은 놀라면, 홱 도는 버릇이 있는 말이었다. 세종은 말 조련을 잘못한 사육사에게 벌을 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 때 강무에는 아홉 살 막내 영흥대군까지 강무에 참여했다. 막내를 끔찍이 사랑한 세종은 아들을 위해 지친 짐승은 따로 울타리로 몰았다. 막내 영흥대군은 그곳에서 편하게 ‘사냥놀이’를 즐겼다. 그때 울타리 다른 곳에서 흰 사슴 한 마리가 뭇 사슴 속에 섞여 있었다. 종친과 군사들은 모두 바라만 보고 잡으려 하는 자가 없었다. 


말을 타고 나선 수양은 “비록 100명이 달려들어도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구경만 하고 있거라”라며 활을 쏘아 죽였다. 그날 행차에 몽골계 출신 귀화인 ‘동나송개(童羅松介)’가 있었다. 그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 수양의 활 솜씨를 보고서 꿇어앉아 말했다. 


“왕자님은 큰 호랑이(大虎)이다. 만약, 우리 땅에 계셨더라면, 최고 영웅 ‘바투르(ba’atur)’가 됐을 것”이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이성계를 뛰어넘어 거의 칭기즈칸과 동급이 된 것이다.

 

▲ 정조 때 발간한 조선 최고의 <무예도보통지> 마상재(馬上才) 


■ 세종, 사냥대회에서 수양 등 왕자들을 제외할 것을 고려


그런데 이날 세종은 이게 아니다 싶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강무 진행 방법을 의논한다. 수양과 왕자 몇몇이 짐승을 다잡아 버리니, 이는 군사들을 강무하는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게다. 


세종은 “짐승을 싹쓸이하는 왕자들은 뒷전에 있게끔 하고, 병사만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넌지시 묻는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냥대회에서 수양 등 왕자들을 제외하는 방법을 고려한 것. 신하들은 “사나운 짐승과 빠른 사슴이 있는데,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라면서 그대로 진행할 것을 청한다. 


수양이 사냥을 좋아하다 보니 주변에도 유독 무인과 한량 등이 모여들었다. 세종의 3남 안평대군과는 대조적이었다. 수양과 달리 안평은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고매한 학식을 지닌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수양의 군호는 원래 진양대군이었다. 세종은 재위 27년째인 144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라는 호칭을 새로 내려줬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죽은 백이·숙제처럼, 너는 현실정치에 관심을 끊고 초탈하게 살아가라”는 당부였다. 세종은 둘째 왕자의 군호를 수양으로 바꾸면서 그런 일이 없도록 기원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양은 1453년(단종1) 10월 10일 마침내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김종서를 제거한다. 그의 나이 37세. 곧이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2년 후 임금이 됐다. 김종서는 영화 <관상>에서처럼 철퇴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혹여 세종은 야심 가득했던 수양의 권력욕을 알아보고, 훗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것일까.(다음회 계속)


 

 

▲ 마상재는 말위에서 펼치는 각종 기술을 말한다.




글 박승규 논설위원  
 

박은주 기자 / silver5195@hanmail.net

기사 댓글 0기사 댓글 펴기

작성자 비밀번호 스팸방지 문자입력 captcha img 등록